
【우리일보 서울=강수선 기자】118년 전, 뉴욕의 거리에서 울려 퍼진 “우리에게 빵과 장미를 달라”는 외침은 오늘 대한민국의 광장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시대적 요청으로 남아 있다. 1908년 3월 8일, 1만 5천여 명의 여성 노동자들은 생존권과 노동권,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참정권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다. 그들의 용기와 연대는 오늘날 세계 여성의 날로 이어져, 전 세계가 성평등의 가치를 되새기는 역사적 이정표가 되었다.
1975년 아이슬란드 여성들의 대규모 파업은 또 하나의 분명한 교훈을 남겼다. 여성이 노동과 일상을 멈출 때, 사회 역시 멈출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여성이 사회 유지의 주변이 아닌 중심에 서 있음을 보여준 역사적 선언이었다.
2026년 오늘, 우리는 정치적 격변의 시간을 지나 이 자리에 서 있다. 민주주의의 위기마다 광장을 지켜온 시민들, 특히 여성들의 헌신과 연대는 한국 민주주의를 지탱해 온 중요한 토대였다. 그러나 정권 교체 이후에도 여성의 삶이 구조적으로 개선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성의 노동은 여전히 저평가되고, 여성에 대한 폭력은 근절되지 않았으며,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여성의 대표성은 충분히 보장되지 못하고 있다. 성평등이 실현되지 않은 민주주의는 온전한 민주주의라 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모든 시민의 동등한 참여 위에서 완성된다.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의 의사결정 기구와 선출직 공직에 남녀 동수 원칙을 제도화함으로써 실질적 대표성을 보장해야 한다. 이는 특정 집단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주권자로서 시민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의 회복이다.
아울러 헌법상 평등권을 구체화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평등법)을 제정하여, 성별을 비롯한 모든 형태의 차별을 실질적으로 금지하는 법적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돌봄은 개인의 사적 부담이 아니라 사회 존속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적 기능이다. 국가는 돌봄의 책임을 제도적으로 명확히 하고, 돌봄노동자의 처우 개선과 권리 보장을 법률로써 확립해야 한다. 또한 성별 임금 격차와 승진 차별의 실태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성평등 공시제를 공공과 민간 전 영역으로 확대하여, 구조적 차별을 실질적으로 해소해야 한다.
모든 영역에서 여성 노동의 가치를 정당하게 평가하고, 차별을 방지하는 제도적 장치를 강화하는 것이 국가의 책무이다.
여성의 신체적 자기결정권과 존엄은 어떠한 경우에도 침해될 수 없는 기본권이다. 강간죄의 구성 요건을 ‘폭행·협박’ 중심에서 ‘동의 여부’ 중심으로 전환하는 형법 개정을 통해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다 충실히 보호해야 한다. 공직사회의 성폭력 예방 시스템을 재정비하고, 온라인 공간에서의 혐오와 폭력을 규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또한 마련되어야 한다.
차별과 배제에 맞서는 우리의 노력은 국경과 신체 조건을 넘어선다. 장애여성에 대한 종합적 지원 체계를 구축하고, 이주여성 및 이주노동자의 권리를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특히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이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과도한 단속과 강제 추방 정책을 재검토할 것을 촉구한다. 아울러 우리는 전쟁과 폭력에 반대하며, 국제사회가 인권과 평화의 원칙에 따라 책임 있게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성평등은 평화와 분리될 수 없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단순한 권력의 교체가 아니라, 소수자의 배제가 용인되지 않는 성평등 민주주의의 실현이다. 정부는 오랜 시간 축적되어 온 시민들의 요구에 성실히 응답해야 한다.
118년 전의 외침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온 것은, 그것이 단지 과거의 구호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존엄과 평등, 그리고 빵과 장미가 보장되는 사회를 향한 걸음을 지속해 나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