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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기고 】 공정과 능력주의, 어떻게 볼 것인가?

체감온도 40도를 넘나드는 더위에 뒤질세라 대선후보들이 내걸고 있는 공정 이슈가 뜨겁다. 여당의 유력 대통령 후보인 이재명 지사는 실질적 평등을 지향하는 것이 공정이라며 ‘성장과 공정’을 주요 공약으로 내걸고, 1호 공약으로 “전환적 공정성장”을 내세웠다. 이낙연 후보도 출마선언에서 상처받은 공정을 다시 세울 것이라는 메시지를 내며, 다른 후보들과 마찬가지로 공정의 가치를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한다.

 

우리 사회의 화두로 떠오른 “공정”

 

윤석열 전 검찰총장도 정의와 공정의 기치를 내세우며 출사표를 던졌다. 가족에 대한 검증이 구체화될수록 검찰과 재계 유착을 의심케 하는 대목에서, 이재명 후보는 “선택적 정의는 방치된 부정의보다 나쁘다”라고 말했다. 여하간 국민의 마음을 사는 데 있어 공정의 가치야말로 최우선 순위라는 사실을 깨달은 정치인들이 공정의 깃발을 치켜들기 이전에도 우리 사회는 공정의 이슈가 주된 담론이었다.

 

작년 말 서울대 도서관의 대출 순위 1위는 <정의란 무엇인가>이었다. 2위도 차별과 공정 문제를 다룬 <선량한 차별주의자>이었다고 한다. 공정과 능력주의에 대한 논의를 다룬 마이클 샌델 교수의 <공정하다는 착각>도 당시 예약순위 1위였다. 심화되는 사회적 불평등에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 세대들이 절망 속에서 희망의 근거 찾기를 치열하게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4년 전의 대선에서도 공정은 뜨거운 논쟁거리였다. 촛불과 코로나 사이에서 ‘과정의 공정’을 약속한 문재인 정권은 여러 면에서 개혁을 시도했고, 공정한 사회를 지향했지만 ‘공정 지수’가 어느 정도인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블라인드 면접과 같이 편견을 줄이고 공정하게 선발하고자 하는 등 여러 노력을 기울이지만, 젊은 세대는 불공정이 우리 사회에서 현재진행형이라고 느낀다. 코로나19 이후 뉴노멀(새로운 표준)을 만들어야 할 시기에 정치인들의 빅 마우스(big mouth)를 넘어서 우리 스스로 우리 사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공동선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야 한다. 

‘능력주의’로 경쟁하면 된다고? 

 

우리나라의 능력주의자들이 본래 의미의 능력주의를 왜곡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전근대적인 암기 위주의 입시와 시험을 공정의 잣대로 치환하는 ‘닥치고 시험’ 주의이다. 조국 가족의 입시 문제에 대해 갖은 이유를 붙여 멸문지화를 당할 만큼 조롱하더니, 결론은 오지선다형의 수능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한다. 홍준표 대표는 사시 부활론자이고, 본고사 부활을 외치는 야당 정치인도 있다. 

 

아니나 다를까. 보수 진영에서 혁명이나 일어난 것처럼 떠들썩하게 등장한 이준석 대표도 ‘닥치고 시험’ 주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생뚱맞게도 공직후보 자격시험을 공약하더니 대변인을 경쟁 방식으로 뽑았다. 공정의 기치 아래 토론 배틀과 압박 면접을 거치고 국민문자 투표까지 실시하면서 언론을 뜨겁게 달구었으니 가히 흥행에는 성공했다고 해야겠다. 그의 ‘공정한 경쟁’은 과연 공정한 것인가? 기회의 평등이란 명목 하에 누구나 동일한 출발선에서 경쟁하도록 하는 것만이 불공정에 대한 해답인가? 

 

더불어민주당 고민정 의원은 능력주의를 내세우는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를 겨냥하여 “능력주의 윤리는 승자들을 오만으로, 패자들은 굴욕과 분노로 몰아간다”는 마이클 샌델 교수의 책 내용을 인용하기도 했다. <공정하다는 착각,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에서 마이클 샌델 교수는 시대의 정의를 고민하는 학자답게 서구 능력주의의 위선을 수많은 사례를 들어 귀납적으로 입증하였고, 전제와 논거가 결과와 불일치할 수밖에 없는 모순을 분석하였다. 서구의 능력주의가 무너지고 있는 판국에 우리 사회 일각의 왜곡된 능력주의가 앞뒤가 맞지 않는 허상이라는 사실을 넘어 불공정을 정당화하고 심화시키는 도구로 쓰일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능력주의는 기본적으로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의 정당화를 지향하게 되기 때문이다. 성과주의를 바탕으로 엘리트 사회 중심으로 짜인 사회구조와 분위기는 공정과 구조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 패자가 단순히 경기에서 패했기 때문에 불평등한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 그로 인해 겪는 삶의 부조리 또한 당연하다면 그러한 공정이 과연 우리 삶에서 필요한 것인가? 

 

그는 또한 사회의 불공정이 증가할수록 사회는 불평등해진다는 점을 역설한다. 능력주의는 성공한 자들을 성공에 취하게 하고, 그들이 성공하는 데 따라주었던 우월적 환경과 행운을 잊어버리게 한다. 봉건시대의 귀족사회에 못지않은 불평등이 능력주의 사회에 존재한다는 것을 망각하면 안 된다.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신념은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동할 수 있다. 노력과 땀은 고귀하지만 재능 없이 노력만 한다고 해서 성공하기는 어렵다. 각 집단에서 재능, 노력, 환경, 운에 따라 성공하는 사람은 피라미드의 꼭대기처럼 늘 일부분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불공정한 시대, 더욱 벌어지는 격차 

 

코로나19 사태 초기, 경제가 마비되고 사회 시스템이 무너지기 시작했을 때 전문가들은 전 세계적으로 5억 명 가량이 추가로 빈곤 계층으로 내몰릴 수 있다며, 포괄적인 구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경고하였다(연합뉴스, 2020.4). 바이든은 불공정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으로 부자증세를 제안하고, 유럽연합도 미국과 함께 공평과세로 세제 개편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코로나 이후의 격차는 오히려 심화되고 있다. 

 

<자본과 이데올로기>로 널리 알려진 프랑스 소장파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소득불평등이 세계적으로 심화되는 현상을 분석하면서 자본소득, 즉 돈이 돈을 버는 속도가 노동해서 돈을 버는 속도보다 빠른 현상을 우려하였다.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피케티지수’가 우리나라는 미국이나 독일의 두 배를 넘는다. 코로나19 이전에도 소득 상위 10퍼센트가 전체 소득의 절반에 육박했는데, 문제는 이 소득 격차가 자본 집적이 고도화된 선진국보다도 더 빠르게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계층이동의 사다리가 하나둘 사라지고 노동의 가치보다 자본의 가치가 지배적인 신세습사회가 되어가는 대한민국에서 두터운 격차의 장벽을 한 뼘이라도 낮추어가며 공존하는 길은 과연 없는 것인가? 

 

다시 돌이키고 싶지 않지만, 지난 세기 말에 우리 사회의 어둡고 일그러진 단면을 보여준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다. 1990년대의 지존파 사건! 엽기적인 연쇄 살인 행각을 벌였던 10대, 20대 초반 사회 초년생들, 그들의 범행 동기는 빈부격차와 부자들에 대한 증오였다. 두목 김기환은 초등학교 6년 내내 우등상을 받았고 반장도 했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진로가 좌절되면서 범죄로 빠져 들었다. 야타족과 오렌지족, 부유층을 범죄의 대상으로 삼았다. 경찰 포토라인에 선 이들의 분노에 찬 눈빛에서 사회적 불공정에 대한 불안과 분노, 평생을 패배자로 살아야 한다는 열패감과 두려움이 읽혀졌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그 때보다 더 공정한가? 함께 나누고 연대할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과 구체적인 보상 체계가 마련되어 있는가? 

 

흙수저라는 자조적 자의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투영하는 수많은 성장 세대들이 사회 초년생으로 진입하자마자 비정규직이나 실업자로, 등 떠밀려 시작한 자영업자로 가혹한 삶을 마주하고 있다. 게다가 60대 청소 노동자의 죽음, 40대 택배 노동자의 죽음, 비정규 청년 노동자의 죽음, 어느 이름 모를 이주 노동자의 죽음까지. 이뿐이랴, 가난과 질병 속에 홀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는 노인들, 빈곤의 종착지 무연고 죽음, 채무로 인한 고통을 견디지 못해 선택한 일가족의 극단적 죽음도 있다. 

  

불공정을 이겨낼 힘, 제도적 공동선 추구해야! 

 

다시 마이클 샌델 교수 얘기로 돌아가 보자. 그는 코로나19 때 자발적으로 월세를 내려서 어려운 세입자의 짐을 덜어준 건물주 사례를 들었다. 미국이 아니라 한국 얘기란다. ‘피케티지수’가 악화되어도 공동체를 살리는 힘, 공동선(common good)을 지향하는 건물주가 나타난다는 사실만으로도 한국 사회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는 피케티의 덕담(?)은 사회의 공정 이슈에 의미 있는 시사점을 준다.  

 

K-방역의 성공도 알고 보면 국가 공동체의 사회적 연대의식이 집단적으로 발현된 결과일 것이다. 나 혼자만 안전하다고 해서 사회 구성원 모두의 안전이 담보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지난 수천 년 간 시련과 고난의 역사 속에서 집단 경험으로 체득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연대하지 않으면 무너지게 된다’는 집단 공속성과 감수성이 우리 민족의 집단 무의식에는 이미 내재되어 있어서 공동체의 위기 징후가 나타나면 이를 감지하고 사회적 유대를 통해 공동체성을 복원하는 모드로 바뀌게 된다. 우리는 익숙한 문화이기에 몰랐지만 샌델 교수는 미국 사회에는 없는 특징이므로 새로운 가능성을 알아본 것이다. K-방역에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 사회에서 장기적으로 불공정 이슈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잘 해결되리라고 낙관하는 근거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각자 개인이 이룩한 성과, 결실, 성공은 능력주의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각자의 실력과 능력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미당 서정주는 ‘자화상’이라는 시에서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었다고 했다. 자연의 바람이 나를 키웠다는 표현은 낭만적으로 들리기도 하지만, 바람으로 상징되는 모든 총체적 요인, 어쩌면 젊음의 방황과 시련, 우연과 사회적 관계, 공동체의 상호관계를 통해 성장하였다는 의미를 내포한 것일 게다. 

 

서구의 능력주의자들이 개인의 성공을 자신의 실력과 노력의 결과임을 당당하게 얘기하는 반면, 우리 선조들은 “운칠기삼”의 결과라며 겸손하게 스스로를 자리매김하였다. 자신보다는 공동체의 다양한 요소가 긍정적으로 상승작용을 하여 자신의 능력 이상의 성취가 가능하였다는 표현이다. 다시 말해 이는 인간의 실력보다 운에 기대야 하니 땀을 흘릴 필요가 없다는 운명론적 발상이 아니고, 그만큼 주변에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적지 않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요즘처럼 복잡계로 얽힌 사회에서 개인에게는 행운처럼 다가오는 사회의 ‘공동선’이 절대 다수를 패배의 낙인에서 구제하는 안전망의 역할을 해낼 것이다. 나의 실력과 노력에 비해 큰 성취와 성공의 기회가 우리 공동체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젊은 세대들이 느낄 정도로 우리 사회의 공공성이 강화되고 공동선이 강조될 때 비로소 우리는 공정의 길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