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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빛낸 원조 아이돌그룹‘차차차 오남매’

5,60년대 가족밴드로 유명세, 전국구 스타 -

[김영준기자]인천을 록의 향연으로 물들일 인천펜타포트 락 페스티벌812일부터 14일까지 송도 달빛공원에서 열린다. 5,60년대 부평 미8군 무대에서 유행했던 록, 재즈는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근간이 되었고 지금 전 세계인이 환호하는 K-pop의 원조가 됐다. 또 이 원동력으로 매년 전 세계 유명 로커들이 즐기고 참여하는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을 개최하고 있다.

 

 5,60년대 부평에는 친 오누이와 사촌 남매로 구성된 차차차 오남매라는 당시로선 전무후무한 가족밴드가 있었다. 부평에서 탄생해 전국적으로 인기를 누렸던 원조 아이돌 그룹이었다.

   

 차차차 오남매에서 드러머였던 차경수(67)씨는 현재 부평에 있는 올리브요양병원 원장이다. 차 원장의 부친도 음악을 좋아했고 젊은시절 기타를 즐겼다고 한다. 그런 영향으로 자식들에게 당시로선 보통사람들은 엄두를 못 냈던 조기 음악교육을 시켰다. 피아노, 기타, 우쿨렐레, 아코디언, 드럼, 하와이안 기타. 비브라폰(vibraphone) . 그의 부친은 유명 선생님들을 집으로 초빙해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치게 했다.

 

차씨 남매가 본격적인 가족밴드 공연을 시작한 것은 1958년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음악을 잘하는 가족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당시 인천시장이 논산훈련소 위문공연을 요청했다. 그때 위문공연 후 인천시장으로부터 감사패도 받았다. 이것이 본격적으로 무대에 서는 계기가 됐다.

 

처음은 미8군 클럽에 초청되어 무대에 올랐다. 미국은 독립기념일, 추수감사절 등 기념일이 많았다. 파티 손님으로 초빙되어 공연을 했다. 8군 무대에 섰을 땐 차차차 오남매가 아닌 ‘Tiny Tots(작은아이들)’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8군 공연이 있는 날은 미군에서 지프나 트럭을 보내줬고 아버지는 학교에 와서 조퇴 신청을 했다. 그러면 친구들은 너 또 공연하러 가냐하고 부러워하곤 했다.

 

당시 무대에서는 누나가 아코디언, 차 원장이 드럼, 그의 사촌형이 기타, 사촌여동생이 하와이안 기타. 여동생이 우쿨렐레를 맡아 연주했다. 무대에서 그들이 불렀던 노래는 당시 유행했던 폴앵커의 다이아나’, 닐 세다카의 오 캐롤’, 엘비스 프레슬리의 ‘Be-Bop-A-Lula’가 주 레퍼토리였다. 노래는 하와이안 기타를 쳤던 사촌여동생이 불렀다. 차 원장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유행곡인 ‘Be-Bop-A-Lula~’ 를 부르면서 거미춤을 췄다고 한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면 미군들이 휘파람을 불고 박수치며 환호성을 보냈다.

 

미군부대 성공이후 국내무대에서도 공연 요청이 들어왔다. 처음 국내무대에 선 곳이 지금은 없어진 국도극장이었다. 60년 초 국도극장은 최고의 무대였다. 국내무대에서는 미8군에서 불렸던 ‘Tiny Tots’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았다. 당시 유행했던 리듬이 차차차였고 가족성이 차씨였기에 차차차 오남매가족밴드로 지었다.

 

차차차 오남매의 인기가 높아지자 당시 최고 꿈의 무대였던 서울 세종문화회관의 전신인 시민회관에 설 수 있었다. 쟈니리, 이봉조 악단, 코미디언 서영춘, 쓰리 보이스의 신선삼 등 주로 1세대 톱스타들과 함께했다. 지방공연은 주로 방학 때 주로 1달 또는 1달 반의 일정으로 짜여졌다. 주로 경부선, 호남선을 타고 이 도시 저 도시를 돌며 공연을 했다. 무대의상, 악기들을 실은 기차를 타고 밤새 부산, 광주 등 큰 도시로 내려갔다. ‘차차차 오남매가 공연을 하면 항상 객석은 만원이었다.

 

차 원장은 공부와 음악을 병행했지만 고등학교 재수가 인생의 모멘텀이 됐다. 중학교 때 공부를 잘해 서울의 유명한 고등학교에 원서를 넣었지만 낙방했다. 고등학교 재수를 한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열등감이 밀려왔다. 재수시절 친구들과 마주치고 싶지않아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공부에 몰두했다. 그가 고등학생이 되고 누나가 대학생이었을 때 차차차 오남매는 해체한다. 1960년 후반 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자식들을 모아놓고 아마추어 밴드로 활동했고, 돈 벌려고 음악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활동을 여기서 접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