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24 (토)

  • 구름많음동두천 17.6℃
  • 흐림백령도 10.7℃
  • 맑음강릉 20.3℃
  • 구름많음서울 18.2℃
  • 구름조금인천 16.9℃
  • 맑음대전 18.5℃
  • 맑음대구 19.0℃
  • 맑음울산 20.0℃
  • 맑음광주 18.4℃
  • 맑음부산 19.1℃
  • 맑음고창 18.4℃
  • 맑음제주 21.3℃
  • 구름많음강화 15.3℃
  • 구름조금보은 17.3℃
  • 맑음금산 18.1℃
  • 맑음강진군 18.7℃
  • 구름조금경주시 20.7℃
  • 맑음거제 19.7℃
기상청 제공

에듀인 뉴스 논설위원 ,전) 평택교육장 '김기연' 출판기념회, 용의 씨는 골고루 뿌려진다

 

【우리일보 최은준 기자】 |  대한민국의 교육은 압축 성장과 사회 발전의 주춧돌로 여겨져 왔다.

과거 우리의 부모 세대는 교육을 통해 가난에서 벗어나고, 개인의 꿈을 실현하며, 국가 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교육은 사회적 계층 이동성을 가능하게 했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통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다. 그 결과 세계 10위의 경제 볼륨을 자랑한다. 이는 대한민국 여권 파워 3위가 그 증거다(세계 227국 중 191국 무비자 입국이 가능).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의 교육은 '샤워실의 바보'처럼 좌충우돌 정책으로 교육 수요자들의 불신이 임계질량을 넘어가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국가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평소 “용의 씨는 골고루 뿌려진다”는 가설을 굳게 믿는 교육자 중 한 명이다. 그 신념을 바탕으로, 우리가 당면한 교육문제에 대해 다양한 시각에서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이 강렬한 외침이 독자들로 하여금 공명을 일으켜 후속 칼럼집을 출간하게 된 동인이 되었다.

 

교육이 더 이상 사회적 계층 이동성을 보장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교육 시스템을 재평가하고 개선해 나가야 한다. 예를 들어, 교육환경의 패러다임을 21세기 버전으로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이를 통해 과거 세대가 누렸던 교육의 혜택을 오늘날의 학생들도 공평하게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함은 선택이 아니라 오늘날의 시대 정신이다.

그간 우리나라의 교육은 과도하고 오도된 교육열로 학생, 학부모, 교사 모두에게 커다란 부담과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 OECD는 낮은 출산율(0.72명) 원인 중 하나로 ‘황금티켓 신드롬’을 말한다. 이는 지나친 경쟁과 과도한 사교육으로 상위권 대학 입학 경쟁에서 소수만 승자가 되는 현상을 일컫는데, 이는 사회 인적 자본의 왜곡을 초래한다.

이러한 경쟁 중심의 교육이 얼마나 학생들의 정신 건강과 학습 동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는 다수의 논문이 입증한다. 학생들은 학업 외에도 다양한 경험과 자아 성찰의 기회를 가져야 하지만, 현재의 교육 시스템은 이를 만족시키지 못 하고 있다. 공교육을 불신하여 매년 약 5만여 명의 청소년이 학교를 떠나고 있으며, 현재 학교 밖 청소년 14만 6천여명이 보여준다(여성가족부). 따라서 지나친 경쟁은 동료 학생들 간의 협력보다는 경쟁을 부추겨, 사회적 연대감을 약화시키는 부작용을 초래한다.

이렇다 보니 학생은 입시 경쟁에 비명을 지르고, 학부모는 사교비 부담, 대학생은 취업난, 회사는 구인난에 신음한다. 실로 구성의 오류다.

 

교육감 직선제 이후 좌파 교육감의 근⸱현대사 왜곡, 재정 사회주의에서나 있을 법한 경로 의존성이 심화된 무상포퓰리즘은 개미지옥을 향하고 있다.

국민들은 보수 교육의 원형을 보고 싶어 했지만, 아직도 기대에 못 미친다. 진보와 보수 교육감 모두 교육의 본질보다는 주변 정책으로 학부모에게 희망 고문을 하고 있다. 이는 교육적이지 않을뿐더러 교육자의 자세에도 어긋난다. 실로 누란(累卵)의 위기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단순히 교육에 그치지 않고 사회 전반에 악영향을 미친다. 교육은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임에도 현재의 교육 제도는 이를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2023년 기준, 전국의 비인가 대안학교가 234개에 달한다. 이는 획일화된 교육의 한계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이처럼 획일화된 교육의 역기능은 학생들의 정보에 대한 면역력만 약화시킬 뿐이다.

게다가, 사회의 도덕성, 학생들의 행복감, 교사에 대한 존경심 등 사회의 정신 자본이 부탄이나 방글라데시만도 못하다.

 

학부모들은 자녀들의 성공을 위해 사교육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느끼고 있으며, 이는 경제적 부담으로 이어진다. 지난해 초·중·고등학교의 공교육비는 약 50조 원인 반면, 사교육비 총액은 약 27조1천억원이다(통계청). 전국민을 대상으로 전수 조사한다면 아마 그 액수는 천문학적일 것으로 예상된다.

이 같은 사교육의 확대는 공교육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교육 격차를 심화시킨다. 사교육은 본래 공교육이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을 보완하기 위한 보완재 기능이었는데, 공교육을 대체하는 대체재 형태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이렇다 보니 가정의 경제적 여건에 따라 교육 기회의 차이가 커지는 문제를 발생시키며,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영어 유치원의 경우 월 교습비가 전국 평균 141만 6천원(서울은 대략 200만원)이다. 평등한 출발선이 되어야 할 영유아 교육까지 생존의 더듬이가 발달한 사교육의 촉수에 의해 서서히 잠식당하고 있다.

 

이는 교육의 기회가 공정하게 주어져야 하는 헌법정신에도 반하며, 특정 계층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구조적인 문제를 야기한다. 사회⸱ 경제적 배경이 유리한 학부모들이 ‘작은 세상 트워크’를 형성하여 혜택을 누리는데, 최근 몇 년간 사회 지도층 자녀들의 교육과 관련된 이중적 행태에 많은 국민들이 실망과 분노를 넘어 저주에 가까운 말을 주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서 자녀 교육문제는 역린(逆鱗)이다. 이는 모든 교육문제가 공정성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강력한 사회적 인식을 반영한다.

예를 들면, 말하기도 진부한 조국 전 교수의 도착적 인식 오류는 비천한 공인의식에 기인한다. 특권의식이라는 우월적 착각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은 인지 부조화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는 신뢰 사회의 난행(亂行)으로, 사회적 암종일 뿐이다. 지식인 사회의 ‘파우스트적 거래(*출세와 명예를 위해 자신의 양심과 도덕을 파는 지식인을 일컫는 말)는 조국 한 사람으로 끝내야 한다.

따라서 불법과 탈법에는 형사처벌뿐만 아니라 사회적 평판의 힘을 통해 공공영역에서 영구히 퇴출시켜야 한다. 이를 통해 사회적 항체가 발붙이지 못하게 하여야 재발을 방지할 수 있다.

 

영국의 정치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는 "불의를 키우는 건 불의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무관심"이라 하였다.

이는 심리학의 방관자 효과로 ‘모두의 책임은 결국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라는 역설을 내포한다. 이로써 도덕적 공황은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이 더욱 심화되고, 국민 통합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프랑스 속담에 ‘가정은 국가의 심장이다’라고 하였다.

 

농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라듯이, 학생들은 부모와 교사의 자장권에서 인성이 삼투되고 꿈을 키우며 성장한다.

 

문제의 가정에 문제의 자녀로 갈음한다. 이렇다 보니 현재 교사의 권위가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다. 권위는 사회를 지탱하는 내구력이다. 한데, 그 내구력이 소진되고 있다.

 

교권이라는 중심가치가 흔들리니 부속가치도 혼란스럽다. 줄기가 요동치니 가지가 요동치는 격이다.

 

오늘을 넘어 미래로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에 발맞추는 교육의 방향은 무엇일까? 앨빈 토플러는 전통적 교육의 한계를 넘어 창의적 사고와 문제 해결 능력을 키우는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보수 진보를 아우르는 21세기 업그레이드된 새 버전이 요구되며, 이를 위해 인물의 객토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 인물은 탁월한 지식 편집가요, 전방위적 지식 경영자여야 한다.

 

이 책은 각기 다른 시각에서 대한민국 교육의 문제를 분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저자는 “용의 씨는 골고루 뿌려진다”는 가설을 평생 교육 신념으로 체화한 원로 교육자다. 모든 교육문제를 못의 문제로 보는 것은 망치를 든 사람의 오류다. 교육계의 신산(辛酸)을 자양분 삼아 갈무리한 내공을 갖춘 구루(guru⸱스승)가 나가수처럼 나타나기를 소망해 본다.

 

사람은 간혹 비겁하게 처신할 수도 있지만, 비겁자는 영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굴절된 정의는 울림이 없듯이 역사는 언제나 진실된 스승이기 때문이다.